구세군 부산요양원 도희자원장 일행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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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작성일10-07-19 14:21 조회6,439회 댓글0건본문
지난 7.19일 본원에 구세군 부산요양원 도희자원장 일행(오른쪽 3번째)이 방문하여 병원을 투어하고 나용승 그랜드자연요양병원장과 상호 협력부분을 협의 하였다. 도희자 원장은 초복 더위에도 선선한 자연바람이 불어오는 병원의 시설과 환경조건을 높이 평가하며 인접해 있는 구세군부산요양원과의 왕래를 통해 선교 2세기의 문을 연 구세군과 함께 지역사회 발전에 함께 공헌하자며 제의하였고 이에 나용승 병원장은 지척에 있는 구세군부산요양원의 발전에 의료분야의 한 축을 담당 할 수 있는 여건이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언제 어디서든지 지원 할 것을 약속하였다. 특히,병원 투어중 병실에서 도희자 원장은 환자들의 밝은 모습에 "반갑습니다. 라며 일일이 덕담을 나누었다." [참고:구세군대한본영/救世軍大韓本營/The Salvation Army Korea Territory]
1907년 구세군 창설자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의 일본 집회 때, 여기에 참가한 한국인 유학생들의 요청으로 1908년 서울 정동에 한국 구세군의 첫번째 영문(營門:구세군교회)이 문을 열었다. 초대 한국 사령관인 영국인 로버트 호가드(Robert Hoggard: 한국명 허가두) 정령(正領)은 8년간의 재임기간 동안 사관 87명, 교인 2,753명, 영문 78개소를 개척하는 놀라운 활약을 보여주었다. 1910년 구세군사관학교의 모체인 성경대학을 개설하여 사관을 배출하기 시작했으며, 1925년에는 영문 170개소, 사관 218명, 평신도 9,000명으로 그 교세가 늘어났다. 1909년 《구세신문》을 발행하고, 1920년에는 사관지를 발행하는 등 활발한 출판활동을 벌였으며, 1916년 29명의 걸인 아동을 돌보는 ‘남자실업관’(서울후생학원)을 시작으로 사회사업에 뛰어들었다. 연이어 빈민 숙박사업, 여자육아원(혜천원), 여자부양소(서울여자관) 등을 신설하고, 각종 재해구제 및 태풍수해 구제, 지붕개량사업, 급식사업, 의료선교사업 등을 벌였으며, 이를 위해 1928년 자선냄비를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한동안 교세가 약해지는 듯하였으나, 광복 후 활발한 활동으로 다시 교세를 확장하였으며,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본영을 옮기고 피난민을 위한 급식사업, 구호사업 등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때 많은 사관들이 순교, 또는 피살되거나 납북당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하였다. 1960년대 현재의 신문로(新門路) 구세군회관을 신축하고, 1970년대 한국인 사령관 전용섭(全龍涉)이 취임하면서 한국 상황에 맞는 선교정책과 개척운동 및 자급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1985년 과천으로 구세군사관학교를 이전하고, 1987년 사관연장교육으로 ‘성교신학원’을 창설하였다. 1989년 전국 구세군 정교연합회를 발족하고, 1996년 평신도 지도자 육성을 위한 ‘권역별 수련원’을 개설하였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신문로1가 58-1번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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